번역 (2016): 첫 한국어 구약은 우크라이나인이 번역했다번역 (2016): 첫 한국어 구약은 우크라이나인이 번역했다

Posted at 2016. 7. 27. 19:47 | Posted in 3. 천국/3.1. 하늘나라 펼쳐 내기
 
 
 

우리 한국 교회의 기독교 수용과 성경 번역 역사를 이야기할 때 우리는 다섯 사람의 서양 선교사들을 떠올린다. 존 로스, 호러스 언더우드, 알렉산더 피터스, 윌리엄 레이놀즈, 제임스 게일, 이렇게 다섯 목사가 그들이다(*아래 사진 왼쪽부터). 그중 나는 우크라이나(UKRAINE) 출신 유대인으로 히브리어는 물론 고대어와 현대어에 능했던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가 한국어로 구약 성경을 번역한 이야기를 해 볼까 한다. 


 

 

 

 
먼저, 만주(滿洲)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한국인들을 만나 북한 지방의 한국어로 신약 성경을 번역했던 스코틀랜드(Scotland) 선교사인 존 로스(John ROSS, 1842 [Scotland] - 1915 [Scotland], 罗约翰; https://en.wikipedia.org/wiki/John_Ross_(missionary)) 를 이야기하련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작은 항구(Rarichie in Easter Ross)에서 의류 도매업을 하던 부유한 가정에서 1842년에 8남매의 장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내며 세상을 궁금해하면서 자라나 글래스고우 대학교와 에딘버러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서른 살 때인 1872년에 '스코틀랜드 장로교 연합 선교회' (Scottish United Presbyterian Mission) 소속 선교사로 만주(滿洲, Manzhou, Маньчжурия)로 들어가서 일하다가 조선의 홍삼 장사들이었던 이 응찬, 김 진기, 서 상륜, 백 홍준을 만나서 한국어를 배우며 신약 성경을 번역하기로 마음먹고 그들 중 한문에 능했고 훗날 소래교회, 새문안교회, 연동교회, 승동교회를 세우는 일에 큰 일을 했던 서 상륜(徐相崙, 1848-1926)과 함께 신약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시작해 1882년에는 「누가복음」과 「요한복음」 번역을 마쳤고, 1887년에는 신약 성경 전체를 다 북한식 한국어로 번역하였다. 그는 지금 스코틀랜드 이스터 로스(Easter Ross) 묘지에 누워있다(http://www.koreanbible.or.kr/100th_anniversary/people/people_trans_view.asp?k_uid=10&page=2&keyfield=&keyword=; 성서한국 2권 4호). 
 
 
 
여기서 로스 목사를 도와 신약 성경 번역에 동참했던 우리 선조들의 이름을 다시 이야기하려고 한다. 서 상륜(徐相崙)은 이 성하(李成夏), 이 응찬(李應贊), 백 홍준(白鴻俊) 등과 함께 존 로스를 도왔는데, 특히 의주 출신 백 홍준(白鴻俊)이 글자본을 쓰고, 목활자를 만들어 납활자로 서 상륜의 만주 심양(봉천) 문광서원에서 1882년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간행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서 상륜은 그 신약 성경 목판을 갖고 다니면서 필요할 때마다 신약 성경을 인쇄하였고, 나중에는 국내에 보급하러 여러 지역을 다니기까지 했다 한다(https://ko.wikipedia.org/wiki/%EC%84%9C%EC%83%81%EB%A5%9C). 세계 선교 역사 가운데 이런 일이 어느 나라에 있었는지 우리는 잘 알지 못 한다. 
 
 

 

 
둘째, 영국 런던 출신으로 소년 때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대학과 네덜란드 개혁교단 계열의 뉴브런스윅 신학교(New Brunswick Theological Seminary)를 마치고 목사가 되어 스물 여섯 살에 인도 선교사로 가려다가 1885년 4월 5일 인천으로 독신으로 입국하여 고아원을 세워 불우한 사람들에게 전도하여 새문안교회를 설립했고 성경 번역에도 손대었는데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를 세우는 일로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가서 소천하여 뉴저지(New Jersey)주 애틀란틱시(Atlantic City)에 묻혀있다가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로 옮겨와 부인과 같이 묻혀있는 호러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 [England] - 1916 [USA], 원 두우 [元杜尤]) 미국 선교사이다. 그는 서른 살이던 1889년 3월에 미국 북장로교회 의료 선교사로서 명성황후의 시의였던 여덟살 연상의 릴리아스 호튼(Lillias HORTON)과 결혼했고, 그 후손들이 4 대째 한국에서 계속해서 살고 있다. 
 
언더우드는 1885년 1월 25일에 일본(JAPAN)에 도착하여 미국 성경공회의 헨리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를 통해 양반 출신으로 임오군란(壬午軍亂, 1882년 여름) 때 명성황후를 구한 덕에 일본에 유학을 갔다가 기독교로 개종한 이 수정(李樹廷, 1842-1886; https://youtu.be/r2sGQeu07ME, https://youtu.be/bTfZacwc-64)을 만나 이 수정이 그해 2월에 한국어로 발간한 「마가복음」(「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을 보고 한국 복음 전도의 가능성을 보았다. 또 언더우드는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년 12월 4일)으로 일본에 망명해 있던 박 영효, 김 옥균, 서 광범, 서 재필을 만났고 그 중 25살 동갑인 서 광범과 더 친하게 지내다가 미국으로 떠나는 서 광범을 뉴욕(New York)의 자신의 형에게 부탁하여 도와주었으며, 이 수정이 번역한 「신약 마가젼 복음셔 언해」 (1885년 2월에 일본 요코하마에서 발간)를 싸들고 1885년 4월 5일에 인천을 통해 입국하였다. 그는 나중에 김 홍집 내각의 법무대신으로 복귀한 서 광범을 친구로 두고 복음을 전하게 된다. 
 
그는 먼저 존 로스가 번역한 신약 성경을 수정하기 위해 <<상임성경위원회>>를 두고 성경 번역에 뛰어들었다가 결국은 몇 해 만에 단순한 수정으로는 안 되겠다 여기고 아예 신약 성경을 새로 번역하게 된다. 이 일에 감리교회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亞扁說羅) 선교사도 함께 하였지만 회의 참석 차 가던 길에 군산 앞바다 어청도 인근에서 순직했다(http://www.thetruthlighthouse.org/wp-content/uploads/2015/12/38-%ED%95%9C%EA%B5%AD%EA%B5%90%ED%9A%8C%EC%82%AC23-...-4.pdf). 헨리 아펜젤러에 대한 글은 여기 있다(http://kcm.kr/dic_view.php?nid=519).
 
언더우드는 새문안교회와 연세대학교와 관련이 있는 선교사이며, 자립심이 강한 네비우스(John Livingston NEVIUS) - 로스(John ROSS) 선교 방식을 한국에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http://www.koreanbible.or.kr/100th_anniversary/people/people_trans_view.asp?k_uid=2&page=3&keyfield=&keyword=; http://kcm.kr/dic_view.php?nid=515). 우리나라에 맨 처음으로 발을 디딘 장로교회 선교사로 좀 알려져 있다. 
 
 
 
셋째, 오대호 옆 캐나다(CANADA) 온타리오(Ontario) 주 엘로라(Elora)에서 스코틀랜드 계 장로교인이었던 아버지와 네덜란드 계 미국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토론토대학 재학 때인 1886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마운트 허몬(Mount Hermon)에서 시카고 기독청년회의 지도자였던 무디(Dwight Lyman MOODY, 1837-1899)가 주관한 "제 1 회 학생 집회"(Summer Conference)에 참석해 "모두 다 가자, 모두에게로!"(All Should Go and Go to All)라는 구호로 진행된 모임에서 감명을 크게 받고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대학을 마친 스물 다섯 살인 1888년에 부산을 통해서 우리나라에 입국한 이래 서 상륜, 서 경조 형제에 의해 1883년 5월 16일에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송천리(松川理)에 세워진 소래교회에 가서 몇 달을 지내면서 한국어 교사인 조사 이 창직(李昌稙)을 만나서 한국어를 공부하며 「천로역정」 (The Pilgrim's Progress)을 한국어로 번역하였고(1893/ 1895 년), 최초의 「한영-영한 사전」을 만들었으며(1897년), 「구운몽」 (九雲夢; The Cloud Dream of the Nine)을 영어로도 번역하였고(1922년), 다섯 명의 선교사가 세운 연동교회의 초대 목사로 27년간 일하는 등 40여년 동안 한국에서 일하다가 1928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일흔네 살에 영국의 배쓰(Bath)에서 소천하여 서울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 모퉁이에 묻혀 있는 제임스 게일(James Scarth GALE, 1863 [CANADA] -1937 [ENGLAND], 기일 [奇一]) 선교사이다. 
 
그는 한국에 들어온 지 10년 동안 독신 평신도 선교사였으나 1892년 4월 7일에 존 헤론(John W. HERON, 1856-1890; 蕙論; http://www.yanghwajin.co.kr/inside/ah15.htm)의 미망인인 해리어트(Harriet HERON)와 결혼해 함경도 원산으로 이사해서 1892년부터 1897년까지 살면서 성경번역위원회(Board of Official Translators) 위원으로 일하며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의「천로역정」을 한국어로 번역하였다(1893년). 또 1897년 5월 13일에는 미국(USA) 인디아나(Indiana) 주 뉴 알바니(New Albany) 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고 미국 북장로교회 목사가 되었다(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1504100061). 그렇지만 원산에서 살았던 그가 어떻게 미국 북장로교회(Presbyterian Church in 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노회에서 목사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신학교 입학과 졸업에 대한 기록도 없으니 말이다. 
 
그는 사무엘 무어(Samuel Forest MOORE, 1860-1906; 모 삼열 [牟三悅]), 그래함 리(Graham LEE, 1861-1916; 이 길함), 프레데릭 밀러(Frederick Scheiblim MILLER, 1867-1939; 민 로아 [閔老雅]), 캐드월래더 빈톤(Cadwallader C. VINTON, 1856-1932; 빈돈), 다니엘 기포드(Daniel Lyman GIFFORD, 1861-1900; 기보) 같은 다섯 명의 선교사가 백정들이나 갖바치들을 전도하여 1894년에 세운 연못골교회(연동교회)의 초대 목사로 1900년부터 1927년까지 일했다. 1922년에는 김 만중의 「구운몽」 (九雲夢; The Cloud Dream of the Nine)을 영어로 번역하였다. 그의 부인이었던 해리어트가 1908년에 먼저 죽자 그는 그녀를 양화진 외국인 묘지의 첫 남편(존 헤론) 옆에 묻어주었다. 그리고 아다 루이스 세일(Ada Louise SALE)과 1910년에 결혼하여 자녀를 낳았고 말년에 영국에서 살다 세상을 떠났다(http://anthony.sogang.ac.kr/GrigsbyGaleChronology.htm). 
 
그는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는 일에 있어서 문법적인 번역이 아닌 의역 위주로 번역하여 다른 성경 번역위원들과 마찰이 심했고 결국 성경번역위원회를 떠나 1925년에 '기독교창문사'를 통해 자신의 신구약 성경을 내놓았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성경번역위원회에서 나간데다 의미 중심으로 번역한 그의 한국어 성경을 받지 않았다. 
 
 
 
넷째, 윌리엄 레이놀즈(William David REYNOLDS, 1867-1951; 이 눌서 [李訥瑞]) 선교사를 빼놓을 수 없다. 미국(USA) 버지니아(Virginia) 주 노포크(Norfolk)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었던 레이놀즈는 히브리어, 라틴어, 불어, 독어 등을 익히고 햄펀시드니 대학(Hampden–Sydney College in Virginia, USA)을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남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891년 안식년을 맞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 해 레이놀즈가 재학 중인 신학교에서 선교 보고를 하게 되는데, 이 때 레이놀즈는 조선 행을 결심하고 볼링(Patsy BOLLING) 양과 한국 선교사로 가기로 하고 결혼한 후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다. 뛰어난 언어 실력을 갖고 있던 그는 한국에 들어와 빠르게 언어를 익히며 전도하여 호남 지역에서 교회를 세우며 성경을 번역하는 일을 하였다. 
 
한국에 적응하고 언어 습득을 마친 레이놀즈 부부는 1894년 3월 27일 군산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임피, 전주, 김제, 영광, 함평, 무안, 해남(우수영), 순천, 여수(좌수영)에서 전도하였다. 동학 농민군이 봉기하기 직전이라 민심이 흉흉했는데도 각 고을을 돌며 전도지를 돌리고 전도 강연을 하며 호남 선교의 문을 열어갔다. 
 
새벽 이슬을 맞으며 조선어와 씨름하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조선말이 입에 붙게 되자 언더우드 선교사, 게일 선교사와 함께 본격적인 성경 번역을 시작하게 된다. 1897년 9월 전주 선교부는 많이 발전하여, 9월 5일 주일에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집회시 예배 인도자 레이놀즈는 선교사들 중에 우리 나라 말을 가장 잘 했고 유식한 말로 설교하였다. 이렇게 모인 예배는 전주 서문교회 설립 시초가 된다.  
 
1895년 레이놀즈는 성경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로 선임되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한다. 성경 번역은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어 선생의 공동작업이라고 할 만큼 한국어 선생의 역할이 클 수밖에 없었는데, 레이놀즈가 한글 성경번역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박학다식한 그의 한국어 선생인 김 필수의 공이 컸다. 
 
레이놀즈는 1917년부터 20년 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 어학 교수와 「신학지남」 편집인으로 일하였다. 「신학지남」은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간행한 기독교신학연구지로 신학교 교수들의 신학 연구 논문을 출판하기 위하여 만든 책이며 장로교회의 신학 이해를 풍성히 하려고 현재까지도 총신대학교에서 꾸준히 간행되고 있다.  
 
 
 
아래 사진은 1900년 경에 언더우드 선교사, 게일 선교사, 레이놀즈 선교사, 존스 선교사가 조선 조사를 두고 성경을 번역하던 모습이다(* 앞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레이놀즈 [William REYNOLDS; 이 눌서], 언더우드 [Horace UNDERWOOD; 원 두우], 게일 [James GALE; 기일], 존스 [George Heber JONES; 조 원시, 1867-1919] 선교사이고, 뒷줄은 문 경호, 김 명준, 정 동명이었다; http://kcm.kr/dic_view.php?nid=39704). 
 
 

 

 
우리나라에서 신약 성경은 존 로스 목사에 의해서 1887년에 한국어로 맨 처음 번역된 이래 언더우드 목사를 통해 1893년에 <<상임성경번역위원회>>를 만들어 북한 말투의 로스 신약 성경을 서울말로 수정하다가 결국 새로 번역을 하여 로스의 신약 성경을 대체할 새 신약 성경으로 1906년에 비로소 출간을 하였다. 그러나 구약 성경은 아직 번역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런 때 알렉산더 피터스가 조선에 입국하였다. 
 
 
 
다섯째, 히브리어 구약 성경 원전을 앞에 놓고 한국어로 번역했던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 알렉산더 알버트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1872. 12. 30. [UKRAINE / RUSSIA] - 1958. 6. 29. [USA]; 피득 [彼得]) 목사를 이제야 소개하게 된다. 그는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연방(USSR)이 생기기 전 표트르 대제(Пётр Великий, 1672-1725; 재위 1682-1725)가 세운 러시아 제국(Российская империя; Russian Empire; 1712-1917) 시절인 1872년에 오늘날의 우크라이나(UKRAINE)의 드니프로(Дніпро; Dnipro; 최근까지의 지명은 '드니프로뻬뜨로브스크' [Дніпропетровськ]였고, 피터스가 살았던 그 당시의 지명은 '예카떼리노슬라브' [Екатеринослав]였음; https://en.wikipedia.org/wiki/Dnipropetrovsk)의 상업에 종사하던 정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1888년에 그는 고전어를 가르치는 인문계 학교(Classical Gymnasium; Гімназія)를 마치고 당시의 심각한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호주(AUSTRALIA)나 미국(USA)으로 가려고 했으나 여행 도중 만난 그곳에서 온 여행자들의 소식으로 두 나라의 사정이 여의치 않다고 하자 러시아의 시베리아 철도 공사장에서 일하려고 러시아로 가기 위해 여정을 바꿔 북향하여 일본(JAPAN)의 나가사끼(Nagasaki)에 도착했다(http://www.bskorea.or.kr/bskorea/pr/bibkorea/bibkor_read.aspx?idx=429; 이 글은 장로회신학대학의 김 중은 교수의 글이나 출전이 빠져 있다). 
 
 
 
피터스는 나가사키에 머물고 있던 1895년 4월 7일 주일 아침에 그 곳에 있는 교회에 찾아가 예배에 참석한다. 히브리어, 희랍어, 라틴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에 능통했지만 영어는 전혀 못 했던 청년 피터스는 예배가 끝난 후 독일어가 가능한 미국 개혁교회 파송 선교사인 피터스(Albertus PIETERS)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그에게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며칠 동안 배우고 4월 19일(금요일) 저녁에 피터스 목사의 사택에서 피터스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유대인이 개종을 하면 그의 성을 바꾸는 관행에 따라서 그는 자신에게 복음과 교리를 가르쳐주고 세례까지 준 피터스(Albertus PIETERS) 목사의 성을 받아 '피터스'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알렉산더 피터스"라 부르게 된다. 
 
 

 

 

 
먼저 피터스(Alexander PIETERS)에게 성경과 교리를 가르쳐 주고 세례(洗禮; Baptism)까지 주었던 미국 개혁교회(The Reformed Church in America) 파송 선교사였던 알베르투스 피터스(Albertus PIETERS, 1869-1955)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알베르투스 피터스는 알렉산더 피터스보다 3년 먼저인 1869년 2월 5일에 미국(USA) 오대호(Great Lakes) 옆 위스콘신(Wisconsin) 주의 알토(Alto; https://en.wikipedia.org/wiki/Alto,_Wisconsin)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호프대학(Hope College)을 마치고 웨스턴신학교(Western Theological Seminary)에서 신학을 전공하여 목회학박사(D. D.; Doctor of Divinity from Western Theological Seminary, 1891) 학위를 받고 목사(牧師; Minister of the Word)가 되었으며, 엠마 콜렌(Emma Kollen)과 결혼하고 선교사가 되어 1891년부터 1923년까지 34년 동안 일본(JAPAN)에서 일했다(http://digitalcommons.hope.edu/cgi/viewcontent.cgi?article=1037&context=collection_registers). 그는 일본에서 일하던 5년째인 1895년 4월에 알렉산더 피터스를 만나서 며칠 동안 성경과 교리를 가르쳐주었고 세례까지 주었다. 그는 1923년에 미국으로 돌아가 1923년부터 1926년까지 호프대학에서 성경과 선교를 가르쳤으며, 1926년부터 1939년까지는 웨스턴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는 1955년 12월 24일에 미국 미시간(Michigan) 주의 홀랜드(Holland)에서 그 숨을 멈췄다. 
 
 
 
세례를 받고 새 사람이 되어 교회에 들어온 스물네 살의 독신이었던 알렉산더 피터스는 미국 성경공회의 헨리 루미스(Henry LOOMIS, 1839-1920)의 청에 따라 조선에서 책을 팔면서 전도하는 권서인(勸書人, colporteur)이 되기로 하고 조선으로 1895년 5월 16일에 인천을 거쳐 서울에 입성하게 된다(성서한국, 54권 2호 [2008 여름]). 
 
 

 

 
그는 1895년 5월부터 1898년 6월까지 3년 동안 미국성서공회 일본 지부 루미스 총무의 관할 아래 한국에서 권서의 일을 열심히 했다. 권서인으로서 활동하면서 피터스는 당시 한국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사랑하고 성경읽기를 좋아하는지 알게 되었다. 아직 구약이 한국어로 번역된 적이 없으며 앞으로 구약 성경이 공인번역위원회를 통해 나오려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것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권서활동을 하면서 틈틈이 시편을 번역하여 한국인들에게 구약의 말씀을 전해주고 싶었다. 그 결과 피터스가 시편 중에서 발췌하여 한국어로 번역한 「시편촬요」 (詩篇撮要)가 1898년에 출간되었다. 피터스는 미국성서공회의 권서 직을 사임했고, 당시 서울에 주재하고 있던 영국성서공회(BFBS) 지부로 옮겨 1898년 7월부터 1899년 말까지 부총무 겸 권서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편촬요」가 구약 국역의 효시로 출간된 경위에 관해서는 피터스 자신이 쓴 글에 나타나 있다(Alex. A. Pieters, "First translations", The Korea Mission Field, May 1938, 91-93쪽). 그는 자신이 번역한 「시편촬요」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섭리로 예수를 믿게 되고, 미국성서공회의 권서로서 나는 1895년 한국에 오게 되었다. 당시 한국의 성서위원회가 신약을 번역하고 있었고, 구약이 앞으로 번역되려면 상당한 시일이 걸릴 것을 알았다. 어려서부터 정통 유대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매일 히브리어 기도서를 읽고 시편의 아름다움과 영감을 맛보면서 암송할 수 있었다. 한국 사람들에게 최소한 시편 중에 얼마라도 번역해 주고 싶었다. 저주 시편을 빼고 시편의 절반 정도의 분량을 번역하는데 약 1년이 걸렸다. 한국어를 잘하는 네 분 선교사에게 번역 원고를 보여드리고 인정을 받았다. 1898년에 출간된 「시편촬요」는 8년 동안 유일한 한국어 구약 역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彼得]와 한글 구약 성경 번역 이야기①: http://www.bskorea.or.kr/bskorea/pr/bibkorea/bibkor_read.aspx?idx=429). 피터스는 하나님의 섭리로 한국에 왔고 시편을 번역했던 것이다.

 

 

 

피터스가 히브리어 원문에서 시편의 일부분을 선정하여(촬요[撮要]: 요점을 골라서 취하여 만든 작은 책자로 영어로는 '써머리' [Summary]라 할 수 있음) 한국어로 번역하여 내놓았던 「시편촬요」는 아래 사진처럼 생겼는데, 이 아래 사진은 인터넷에 있는 사진을 가지고 내가 새로 편집하여 펼쳐진 모양으로 재구성한 것임을 밝혀놓는다.

 

 

 

 

피터스가 구약 성경 원문에서 번역한 「시편촬요」는 1898년 10월과 11월 두 차례에 걸쳐 약 2500부가 당시 서울의 감리교 '삼문출판사'를 통해 간행된 것으로 알려졌다. 「시편촬요」는 가로 18센티미터 세로 12센티미터이고, 국문으로 인쇄되었으며, 모두 65쪽 분량이었다. 시편의 절반 가량을 번역했다고 하지만 실제로 시편 150편 중에서 예순 두 편을 수록하고 있다. 박 용규 교수는 「시편촬요」의 출간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시편촬요」는 출판되자마자 수요가 폭발했다. 곧 매진되었다. 루미스의 말을 빌린다면, 수요를 다 감당치 못할 정도였다. 마가렛 힐스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1911년 구약에 사용된 시편 번역에 공헌했다.>> (박 용규, "알렉산더 피터스, Alexander Albert Pieters, 1871-1958: 성경번역자, 찬송가 작사자, 복음전도자, 1895-1911", 평양 대 부흥 100 주년 기념 알렉산더 피터스 선교사 조명, 서울 내곡교회 한국교회사연구소, 2007, 51쪽). 

 

 

 

그는 1899년 영국성서공회 서울 지부에서 일하던 자리를 사직하고, 1900년 1월 미국 시카고(Chicago)에 있는 맥코믹 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로 신학을 공부하러 떠나서 3년간 재학하는 동안 1901년에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본부에 선교사로 지원하였고, 1902년에 엘리자벳 캠벨(Elizabeth CAMPBELL)과 결혼하고, 1904년 5월 16일 한국으로 또 돌아왔다. 그러나 1906년 1월에 아내 캠벨은 숨을 거두었다. 

 

부인이었던 캠벨이 소천하던 해인 1906년 10월 3일에 <<성경공인번역위원회>>의 위원으로 크램(Willard Gliden CRAM, 1875-1969, 奇義男)과 함께 선임된 피터스는 그때부터 레이놀즈, 크램과 함께 구약 번역에 매진하여 1910년 4월 2일에 구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마쳤다. 1904년 10월 17일부터 1910년 4월 2일까지 히브리어에 능통한 유대인 출신의 우크라이나 목사인 알렉산더 피터스의 손길에서 구약 성경이 한국어로 활자화되었다. 그리하여 1911년 3월 9일에 구약 두 권, 신약 한 권으로 한국어로 신구약 성경이 세상 앞에 드러나게 되었다. 그것이 「한글 구역 성경 전서」 (1911)이다.  

 

<<성경공인번역위원회가>> 마침내 1911년 3월에 신구약 성경을 출판하게 되자 그 번역위원회를 해체하고 <<개역위원회>> (The Board of Revisers)를 열게 되는데, 이때 제임스 게일이 주도권을 잡으려다 위원회에서 나가고, 피터스 목사는 1926년 이후에 <<구약개역위원회>>의 평생 회원으로 위촉되어 '개역위원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배어드(William Martyn BAIRD, 1862-1931) 선교사를 도와 「국역 구약 성경」을 다시 고치는 일에 윌리엄 레이놀즈와 함께 이 원모 조사의 도움을 받아 1930년까지 매진하였다. 

 

그러다 둘째 부인으로 서울에서 같이 살았던 에바 필드(Eva Field PIETERS, 1868-1932)가 1932년 7월에 세상을 떠나자 그는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그녀를 묻고 다음 해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마침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는 재정난을 이유로 예순세 살이나 되었고 아내마저 사별한 피터스를 다시 한국으로 보내는 일에 나서지 않게 된다. 그러나 한국에 있었던 선교사들은 구약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는 일을 완벽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사람은 유대인으로 히브리어에 능한데다 한국어까지 가능한 알렉산더 피터스보다 더한 적임자는 세상에 없다고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에 청하여 어렵게 다시 피터스는 한국으로 돌아온다. 1934년에 셋째 부인인 앤 쿠퍼(Anne COOPER)와 결혼하고 말이다. 

 

 

 

그렇게 피터스 목사가 한국으로 돌아와 몇 달을 지낸 후인 다음 해, 1935년 새해부터 구약 성경 개역 작업은 다시 시작되었다. 레이놀즈는 한국인 조사 이 원모를 개역위원회에 위촉했고, 레이놀즈, 피터스, 이 원모는 서울, 평양, 지리산의 별장을 오가며 1936년 3월까지 구약 성경의 개역 작업을 마치고 1936년 12월에 출판하였다(「개역 구약전서」 1936년판). 그러나 피터스가 본격적으로 함께 하기 전의 번역이었던 터라 번역상의 문제들이 드러나 레이놀즈는 피터스에게 이 원모를 조사로 두고 다시 완벽하게 마무리하도록 하여 마침내 1937년 8월에 피터스 목사와 이 원모 조사는 그 일을 마친다. 그러자 한 달 후인 1937년 9월 22일에 <<상임성서실행위원회>>는 곧장 '신약개역위원회'와 '구약개역위원회'의 번역본을 받았고, 1938년 9월 2일에 「개역 성경 전서」로 출판하였다. 그렇게 구약 성경의 한국어 번역이 우크라이나인 목사 '피터스'의 손끝에서 마무리되었다. 

 

 

 

 

 

 

존 로스 목사와 서 상륜에 의해 북한 한국어로 번역된 신약 성경이 출간되던 것에 비해 구약 성경 번역이 전무하던 19세기 말엽인 1895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말을 배운 후 3년 뒤인 1898년 10월에 시편 예순 두 편을 한국어로 번역해 「시편촬요」란 이름으로 한국 교회 앞에 내놓았고, 이어서 13년 후인 1911년에는 「한글 구역 성경 전서」가 나오는 일에 손을 보탰던 알렉산더 피터스는 1938년 9월 2일에 「개역 성경 전서」가 출판될 때에도 이 원모와 함께 한국어로 구약 성경을 마지막까지 신중하게 번역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1898년부터 1938년까지 실로 반 세기 동안 자신의 몸을 한국어 구약 성경 번역에 전념한 것이다. 그렇게 자신의 생애를 한국 교회의 구약 성경 번역에 쏟았던 우크라이나 출신 유대인이었던 알렉산더 피터스 목사는 일흔 살이 되던 1941년에 45년간의 한국 생활을 접고 부인의 나라인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1958년 6월 29일에 생을 마감했다. 

 

 

 

 

우리나라와 아무 상관이 없을 것 같았던 우크라이나(UKRAINE), 그저 축구 선수 셰브첸꼬(Andriy SHEVCHENKO)의 나라나 아름다운 미녀들이 많은 나라 정도로만 알고 있던 동유럽의 숨겨진 나라 우크라이나가 '알렉산더 피터스'라는 인물을 통해 우리와 뗄 수 없는 나라, 특히 한국 기독교회와는 뗄 수 없는 복음 안에서 묶인 나라임을 알게 되었으리라 믿는다. 한국 개신교회는 동유럽의 우크라이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끝으로 알렉산더 피터스의 성경 번역사에 관한 글들이 있는 <<대한성서공회>>의 자료이다(①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彼得]와 한글 구약 성경 번역 이야기 [Ⅰ]: http://www.koreanbible.or.kr/100th_anniversary/people/people_trans_view.asp?k_uid=11&page=1&keyfield=&keyword=, "한글 성경 번역과 번역자들", 성서한국 54권 2호; ② 알렉산더 피터스[Alexander Albert Pieters, 彼得]와 한글 구약 성경 번역 이야기 [Ⅱ]: http://www.koreanbible.or.kr/100th_anniversary/people/people_trans_view.asp?k_uid=12&page=1&keyfield=&keyword=, 성서한국 54권 3호).

 

한국에서 일했던 외국 선교사들의 이름이나 생몰 연도는 다음의 유씨엘에이의 한 싸이트가 도움이 되었다(http://koreanchristianity.humnet.ucla.edu/biographies/missionaries: UCLA ONLINE ARCHIVE KOREAN CHRISTIANITY [Missionaries]). 

 

 

 

2016년 6월 22일(수요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고 창원(http://gohchangwon.tistory.com)

2016년 7월 27일(수요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고 창원(http://gohchangwon.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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